00 지도
01 “무키반다“란 이름의 유래
무키반다유적의이름은유적중앙부(이건물주변)의지역명‘사이하쿠군다이센정오아자무키아자반다’와예로부터불려오던‘무키야마’, ‘반다야마’라는이름을따서붙여진것입니다.
또한, ‘무키’라는지명의유래는알려지지않았지만에도시대에다음과같은전설이있었습니다.
호키민담기
<돗토리번사마쓰오카노부마사편, 간포 2년(1742) 편찬>
고닌천황의황후가이지역출신으로, 천황의명으로 ‘쓰마키노사토(아내가온마을)’라불리게되었다.
아사즈마엔기
<저자, 편찬연대불명(에도시대말기?)>
몬무천황의황후가이지역출신으로천황이 ‘호키에는길게뻗은구름, 다이센지절, 쓰마키노사토가있다고들었네’라는시를지었다는데서유래했다.
02 설화 “산들의 키재기”
옛날옛적에고려의신이다이센산과높이를겨루기위해바다를건너한반도의산을가져왔습니다. 하지만구름사이에서모습을드러낸다이센산의웅장함에놀라가져온산을놓고돌아가버렸습니다. 이산은지금도다이센산기슭에남아고레이(高麗)산이라불리며지역주민들에게사랑받고있습니다.
03 여기저기에 유적이 가득! =찾아보자, 무키반다 주변의 유적
요도에평야의서쪽에는과거에바다와연결된석호가있었습니다. 이석호가항구역할을 하며다양한지역과 교류하는 거점이 되면서 이 지역 일대는대단히 융성했습니다.따라서 주변에는조몬시대부터야요이시대, 고훈시대, 아스카시대에달하는수많은유적이있습니다.
오른쪽에 있는 버튼을 눌러보며다양한유적지를확인해 봅시다.
04 구니비키 신화(다른 곳에서 땅을 끌어 와 영토를 넓혔다는 신화)
옛날옛적에이즈모국을다스렸던야쓰카미즈오미쓰누노미코토는고시국(지금의호쿠리쿠지방) 쓰쓰노미사키의넘치는부분을굵은밧줄에매달아끌어당겨미호노미사키(미호노세키)를만들었습니다. 이때사용된밧줄이요미노시마(유미가하마)가되고, 밧줄을매단말뚝이히노카미다케(다이센산)가되었다고합니다.
05 하늘에서 본 무키반다 유적
무키반다 유적(국가지정사적)
위치:
돗토리현요나고시사이하쿠군다이센정
개요:
1000여 채의건물터와다량의철기가출토된야요이시대의취락. 유적의규모는약 170ha에달하며국내최대급 크기.
지정연월일:
1999년 12월 22일
06 마을의 변천사-취락의 시초에서 쇠퇴까지
마을의시작(기원전 1세기~후 1세기 전반)

마쓰오가시라지구에집을짓고사람들이살기시작했습니다. 그외지구에는저장구덩이가만들어졌습니다.
지배자 묘의 출현(1세기 후반)

마쓰오가시라지구, 무키니야마지구, 무키야마지구에집이세워지고마을이넓어지기시작합니다. 이시기에는무키니야마지구가중심주거지역이었던것으로추정됩니다. 또한, 도노하라지구의언덕주변에는환호(적의침입을막기위한도랑)를팠으며, 전망좋은뒤편언덕에는족장의무덤이만들어졌습니다.
마을의확대(2세기 전반)

무키니야마, 무키야마, 마쓰오가시라, 이렇게세지구를중심으로마을은더욱넓어져가옥수도이전시기의두배로늘어났습니다. 족장의무덤은도노하라에서센타니지구로이장되어무키반다유적에서가장큰센타니 1호묘가만들어졌습니다.
마을이 가장 융성하였을 때(2세기 후반)

마을은언덕전체로퍼져전성기를맞이합니다. 이시기의중심주거지역은무키야마지구이며, 전체의절반에달하는약 70채의집이밀집되어있었습니다.
그러나이시기의족장의무덤은아직발견되지않은 것으로 보아 무키반다유적외부에만들어졌을지도모릅니다.
마을의축소(3세기 전반)

가옥수가줄어마을의크기는작아졌지만무키야마지구와마쓰오가시라지구에집들이모여있던것으로보아여전히중심적인주거지역이었던것으로추정됩니다. 이때, 센타니지구와마쓰오가시라지구에족장의무덤이생겨납니다.
마을의 쇠퇴와 고분 축조(3세기 후반~6세기)

고훈시대에들어와마을은축소되고점차거주지로서의역할이사라졌습니다. 그후에이지역을다스린유력자들의무덤인무키야마고분군, 반다야마(番田山) 고분군, 반다야마(晩田山) 고분군, 마쓰오가시라고분군이만들어졌습니다.
07 고상창고 짓기
1세기중엽에환호(적의침입을막기위한도랑)가만들어진도노하라지구서쪽구릉에는 2세기에들어환호가사라지고움집과고상창고가지어졌습니다. 이것은고상창고를짓는모습을재현한것입니다.
기둥과벽에쓰일목재는인근숲에서조달합니다. 안쪽에보이는것은돌도끼(태형대합날석부)로나무를베는모습으로, 벤나무는가지를잘라내고껍질을벗깁니다.
왼쪽에서는고상창고의벽재로사용될나무판을만들고있습니다. 야요이시대에는톱이없었기에판을만들려면통나무에쐐기를박아갈라서돌이나철제손도끼를사용하여표면을평평하게만들어야 했습니다.
목재외에도다양한재료가필요합니다. 가운데있는사람들은목재를묶기위한새끼줄을꼬고있습니다.
그옆에는지붕에쓸억새를쌓고있습니다. 이렇게많은사람의협업을통해하나의건물이완성되는것입니다.
(축척: 1/50)
08 야요이인들의 나무 이용
야요이인들의 나무 이용

열매: 식량, 염료
잎: 퇴비, 연료, 염료
가지: 연료, 도구 손잡이, 바구니 재료
줄기·굵은 가지: 건축재, 의례 도구, 그릇, 무기, 식기, 사냥 도구, 농공구
재: 염색 매염제, 불순물 및 잡맛 제거
수액: 옻칠, 접착제
나무껍질: 지붕재, 벽재, 그릇, 염료, 끈, 의복
산동백나무로 된 방망이·숟가락-단단한심재를사용

방망이는잎찧기용과콩찧기용등으로나뉘며전시된방망이는콩찧기용과비슷합니다. 흙과나무로만든숟가락이조몬시대부터등장했고, 나라·헤이안시대에는금속및조개껍데기등으로만든것도나타납니다. 나무는안쪽의불그스름한심재와바깥쪽의하얀변재로나뉩니다. 방망이에는단단하고잘썩지않는심재가사용되었습니다. 전시품은아오야가미지치유적출토품을참고하여실제크기로복원한것입니다.
붉가시나무로 된 괭이-단단한 나무를 사용

이괭이는가지모양과비슷하다하여가지형곡병부괭이라불립니다. 괭이외에도가래및흙받기와같은농기구대부분은붉가시나무로만들어졌습니다. 단단한붉가시나무는가공하기쉽도록물에담가부드럽게만드는데시마네현니시카와쓰유적등에서이를위한저목장도발견되었습니다. 전시품은이케노우치유적출토품을참고하여실제크기로복원한것입니다.
비쭈기나무로 된 손도끼-가지를사용

야요이시대에는주로벌목용도끼와가공용손도끼를사용했습니다. 가공용손도끼는야요이시대후기가되면철기의보급과함께돌에서철제로바뀌지만, 벌목용으로는돌도끼가계속쓰였습니다. 가공용손도끼에는나무줄기에서가지가뻗어나오는부분이쓰이는데, 줄기에날을박고가지를자루로사용합니다. 줄기와가지의각도가손도끼로쓰기에알맞은비쭈기나무가많이쓰였습니다. 전시품은아오야가미지치유적출토품을참고하여실제크기로복원한것입니다.
산뽕나무로 된 굽다리접시-뒤틀리지 않게 나뭇결을 도려내 사용

꽃잎모양의장식이달린굽다리접시는호쿠리쿠에서산인에걸쳐남아있는독특한접시입니다. 이렇게정교하게만들어진접시는매우귀중한것으로의식에서만사용하거나족장등신분이높은사람들만소유할수있었던것으로보입니다. 비교적얕은용기는횡목을사용해만든것으로, 곧은결이용기입구부분에오게만들면건조해도변형이잘생기지않는다고합니다. 전시품은아오야가미지치유적출토품을참고하여 70% 정도크기로복원한것입니다.
느티나무로 된 목기-아름다운나뭇결을 활용

목기에는컵모양이나손잡이혹은발이달린것 등다양한형태가있습니다. 특히컵모양목기는산인및호쿠리쿠지역에서많이출토됩니다. 나뭇결이아름다운느티나무는그릇과같은식기에많이사용되었습니다. 전시품은아오야가미지치유적의출토품을참고하여실제크기로복원한것입니다.
삼나무로 된 물통-용기 모양에 맞추어 목재를 사용

나무를도려내어만든 물통은야요이시대중엽부터만들어졌습니다. 긴키에서규슈에걸쳐출토되지만산인및호쿠리쿠에서특히많이발견됩니다. 속이깊은통이나물뜨개처럼세로로긴물건은횡목을사용하려면큰나무가필요하기에종목으로만들었습니다. 전시품은아오야가미지치유적출토품을참고하여실제크기로복원한것입니다.
09 이용된 나무
삼나무

세계유산인야쿠시마의조몬삼나무가유명함. 일부는높이 50m, 지름 5m의거목으로자라기도하는낙우송과의상록교목.
느티나무

도로나공원에서많이볼 수있음. 높이 30m, 지름 2m까지자라는느릅나무과의낙엽교목.
뽕나무

뽕잎은비단을만드는데필요한누에의중요한식량. 높이 10m, 지름 60cm까지자라는뽕나무과의낙엽교목.
비쭈기나무

신사에서많이볼 수있음. 높이 12m, 지름 30cm 정도의차나무과의중교목.
산동백나무

꽃이드문 겨울에붉은꽃을피우는나무. 높이 6m, 지름 50 cm가되는것도있음. 동백과의소교목.
도토리나무

목재의 빛깔이 붉은빛을띠어 붉가시나무라 불림. 높이 20m, 지름 2m나되는너도밤나무과의상록 교목.
밤나무

밤은맛있지만 6월경에피는꽃에서는독특한냄새가남. 높이 10m, 지름 30cm 정도까지자라는참나무과의낙엽교목.
10 마을의 사계절과 자연의 혜택

벼농사가시작된야요이시대. 그러나야요이인들은밥만먹지않았습니다. 자연과더불어계절에따라변화하는자연의산물들을생활에지혜롭게적용하고있었습니다.
이용방법의여러형태
논

논은벼농사뿐만아니라고기잡이와사냥터이기도했습니다. 물을채운논과수로에사는잉어, 붕어, 메기등의생선, 우렁이, 재첩등의조개를채집하거나이들을먹이로삼는새와벼이삭을먹으러온짐승을사냥하기도했습니다.
조개·성게

조개는팔찌등의장신구나토기표면에무늬를새기는도구로쓰였습니다. 특히전복은맛이좋을뿐만아니라진주까지얻을수있는일석이조의조개였습니다. 또한, 성게의가시는재봉바늘로쓰이기도했습니다.
봄·여름
사슴

사슴의고기는중요한육류였으며뿔, 가죽, 뼈도다양한도구의재료로활용되었습니다. 또한, 사슴의뿔은벼와성장주기가비슷하기때문에신성시되어, 사슴의피에는벼를키우는신령한힘이있다고여겨진모양입니다.
가을·겨울
억새

가을에베어낸억새와갈대는집의지붕을 이는 데 쓰였습니다.
새

고기는 식량으로 쓰이고, 날개는 머리 장식이나 화살깃, 방한구 등으로 활용한 것으로 보입니다. 뼈는 작살 등의 어로구나 바늘을넣는용기로도 쓰였습니다.
멧돼지·너구리·토끼

고기와내장, 골수는식량으로, 모피는옷과 깔개,자루로사용했습니다.
멧돼지의송곳니는구멍을뚫어펜던트로 만들고,견갑골은길흉을 점치는 데 쓰였습니다. 아래턱뼈는농경 관련의례에사용되었습니다.
11 무키반다 유적의 철기
철이 전해져 온 길

철기를만드는소재는대륙에서직접 들어 오거나 북부규슈를 거쳐 산인지역으로운반되었습니다.
철로도구를만들다

야요이시대에는석기로철제도구를만들었습니다. 숯불에원료인철을빨갛게될때까지가열한후, 모루위에서두드려펴서구부리거나끌로잘라서만들었습니다.
1 새빨개질때까지철을가열한다
2 열이식기전에철을두드려편다
두드려편상태
3 철을구부려모양을잡는다
구부려서모양을잡은상태
4 갈아서날을세운다
5 자루를붙여완성
생활을바꾼철로 된 도구들

돌보다날이날카로운철제도구사용으로단단한목재도쉽게가공할수있게되어정밀한세공이가능해졌습니다. 또한, 다소무뎌진날은갈아서몇번이고재사용할수있게되었습니다.
12 무키반다 유적의 건물
움집(수혈주거)의지붕

움집지붕은억새등을이어만든초가지붕과초가지붕위에흙을덮은흙지붕으로나뉩니다.
마을의모습

어느한 시기의마을모습을복원해 보니, 3채에서 5채의수혈주거가 한데 모여 지어진 것을 알 수 있었습니다. 이들은 ‘가족’으로도 부를 수 있는 집단으로 집안의 가장과 그 친척 세대가 모여 살았습니다. 무키반다는 이러한 ‘가족’이 30 무리 가까이모여 살던 큰 마을입니다.
가족과집

야요이인은 5인가족?
일반적으로 한 가구당 5명 정도였던 것으로 여겨지며,그근거로몇 가지 설이있습니다.
1 수혈주거에남은개인용식기가 5명분이었기때문에.
2 ≪후한서≫ <군국지>에기록된중국(2세기)의 1호당인원수가 5명이기때문에.
3 1인당필요한면적을 3m2로 생각했을 때, 화로공간 3m2를빼고계산하면 5명분 의 넓이가되기때문에.
(20m2/바닥 면적-3m2/화로)÷3m2/1인당 면적=5.6명
집의 규모는6평?
무키반다의집은, 작게는 8m2(2.4평), 크게는 50m2(15.1평)에 다다릅니다. 평균적으로는 20m2(6평) 정도의크기입니다.
전성기 때마을의인구는 200명?
무키반다유적의전성기(2세기후반)에는, 한때 45채정도의수혈주거가지어진 것으로보입니다. 한 채당 거주 인원을 5명으로 봤을 때, 마을에는 총 225명이살았던 것으로 추정됩니다.
13 야요이 시대의 건물 복원

소재검토
유적에서발견된 건축 부재와토기에그려진 그림 등을 바탕으로건물의형태 및구조를 추정합니다.
모형 제작과 설계도 작성
모형을만들며건물의구조를다양하게검토합니다. 구조가 결정되면모형을토대로설계도를그립니다.
복원 작업
실제 복원작업에서는 모든 공정에서 전통 목조건축 기술이 많이 쓰입니다.
1 부재가공
산에서 베어 온 목재는 가공 후 손도끼를 이용하여나무껍질을 아름답게 다듬습니다.
2 조립
구부러진 자연목을 잘 짜맞추면서 마무리합니다.
3 지붕 이기
지붕위를억새나 갈대로 덮습니다.
4 완성
14 복원한 건물의 모형
불에 탄 집

무키야마지구에서발견된제43호수혈주거는화재로탄흙지붕움집입니다. 무키야마지구가가장번성했던약 1,800년전야요이시대후기후반의집으로모퉁이가둥근사각형모양이며한변이 5m 정도의크기입니다.
거의모든기둥, 서까래, 지붕을인억새와그위에쌓은흙등이불에타무너진채로남아있었기때문에지붕구조를복원할수있었습니다. 지붕바닥에조밀하게늘어놓은판형서까래위에이엉을수평으로깐후, 그위에세로방향으로억새를이어흙으로덮어서만들었습니다.
유력자의주거

이건물은차양달린단층건물에서북동쪽으로 40m 정도떨어진곳에지어진대형움집(제45호수혈주거)입니다. 이집은안에중심기둥이없고,벽을따라 7개의작은기둥을세워벽으로지붕을지탱하고있는구조입니다. 집안에서는중국에서온청동거울조각이발굴되었는데,깨진거울을펜던트로재활용한것입니다. 출토품및주거구조로보아마을을다스린사람(왕)이살던곳으로추정됩니다.
마을의제전(제사를 지내는 건물)

이건물은마쓰오가시라지구에서발견된대형건물(제41호굴립주건물)을복원한것입니다. 5개의긴기둥과 4개의짧은기둥으로이루어진단층구조로몸채양쪽에 ‘차양’이있으며사방이경사진우진각지붕입니다. 몸채넓이는약 32m2로, 모형에보이는격자창은아오야가미지치유적에서출토된것을참고하여복원한것입니다. 이건물근처에마을을다스린족장의주거지로보이는대형움집이있는것으로보아이차양달린건물은마을의제사를지내는제전으로추정됩니다.
15 교류를 나타내는 증거
야요이의네트워크 -무키반다의교역활동-

일본해를동서로연결하는무역에서석호는중요한천연항구였습니다. 석호를낀아오야가미지치유적과같은장소는기항지로서중요한역할을했으며, 무키반다유적처럼석호가내려다보이는산위의취락은거주의본거지로서, 이들이하나가되어교역활동을했습니다. 또한거울및철기등과같은귀중한물자는각취락족장의네트워크를통해입수할수있었습니다.
무키반다 유적에서 출토된 파경(깨진 거울)

무키반다 유적에서출토된파경은내행화문경(중국제 청동 거울)일가능성이 높은 것으로 추정됩니다.
일본해 연안으로 퍼져 나간 철기

일본해연안지역에는철기가많이출토되는유적이다수있습니다. 특히무키반다유적에서는소형공구(새기개, 구멍뚫이, 주머니형철도끼등)를중심으로 300점이상의철기가출토되어, 한유적에서발굴된수량으로는일본에서손꼽힐정도입니다. 한반도에서직접들여온것으로추정되는따비와규슈북부에서만들어진것으로추정되는철제도끼등을통해그지역들과교류가있었음을알 수있습니다.
무키반다 유적에서출토된단조따비

무키반다 유적에서 출토된 단조 따비는 한국 팔달동 9호널무덤출토품을참고하여 복원한 것입니다. 따비란 한반도에서 만들어진 밭갈이용 농기구로, 날을 발로 밟는 원시적인 형태의 쟁기입니다.
무키반다 유적에서출토된주조따비

무키반다 유적에서 출토된 주조 따비는 오나루(大平) 유적출토품을참고하여 복원한 것입니다. 따비란 한반도에서 만들어진 밭갈이용 농기구로, 날을 발로 밟는 원시적인 형태의 쟁기입니다.
북부규슈제띠주머니형철도끼

무키반다유적에서는북부규슈제로 추정되는 띠주머니형철도끼가출토되었습니다. 자루를꽂는 도끼날 주머니 입구를바깥쪽으로접어놓은것이특징입니다.
무키반다유적의 철기 생산

철기와함께제조기술및지식도규슈북부로부터전해졌습니다. 대장간으로추정되는움집바닥에서빨갛게탄가마의흔적이발견되었으며,녹슬거나열로인해붉게변한모루와돌공이, 판형철기소재및끌로자른철기조각등이발굴되었습니다.
철기 제작과 철편 조각

삼각형이나 화살촉 모양 등의철편은철기를만드는과정에서끌로 잘려나간 자투리 쇳조각입니다.
석기를 통해 본 교류

무키반다유적에는녹색응회암과벽옥으로만든구슬외에도교류를증명하는석기가있습니다. 시마네현오키제도(도고)의흑요석과가가와현가나야마의사누카이트(안산암)가화살촉재료로사용되었습니다. 또한, 규슈북부의것과형태가유사한고기잡이용추가남아있는것으로보아동일한방법이전파된것으로보입니다.
무키반다유적의옥과 옥 만들기

무키반다유적에서는파란색과감색의장식용유리구슬옥과대롱옥이발굴되었습니다. 유리는규슈북부와긴키북부에서많이출토되므로이들지역과의교역을통해들어온것으로추정됩니다. 또한, 산인에서호쿠리쿠에걸쳐녹색응회암, 벽옥, 수정등의석재를이용한구슬제조를했던취락이많이있습니다. 구슬류는중요한교역품이었던것으로보여집니다.
녹색응회암구슬만들기

1 원석표면을평평하게다듬는다
2 돌톱으로틈을 갈라 깬다
3 계속해서 이등분하여 직육면체를 만든다
4 옆면을 다듬는다
5 숫돌로 간다
6 돌바늘로 구멍을 낸다
7 완성
벽옥구슬만들기

1 원석을적당한크기로쪼갠다
2 끌로 잘라 가른다
3 옆면을다듬는다
4 숫돌로간다
5 쇠바늘로구멍을낸다
6 완성
교류를 말해 주는 토기

무키반다유적에서출토된토기중에는기타킨키(교토·효고현 북부), 이나바(돗토리현 동부), 히가시호키(돗토리현 중부), 빈고(히로시마현 북부), 세토우치서부(야마구치현 남부)지역의특징을지닌토기가있습니다. 또한, 무키반다유적이있는호키(돗토리현 중·서부)의토기가이나바(돗토리현 동부)에서출토된적도있습니다. 토기자체가교역품이거나토기의내용물이교역품일경우, 토기를사용한의식이목적이었을경우등으로추정됩니다.
교류를 말해 주는 제사 형태

일본해연안지역에는네모서리돌출형분구묘라불리는독특한모양의무덤이있습니다. 같은형태의무덤에족장을매장하고제사를지내는장송의식을통해지역사회가이어져있었음을알 수있습니다.
대륙과의교류~해류를 타고~

대륙에서건너온거울, 철제도끼및검, 유리제품은권위를상징하는귀중한물품입니다.
이들중거울처럼일반적으로많은철기가출토되는규슈북부를경유해온것도있지만, 한반도에서만들어진따비나어깨가넓은철도끼(유견철부)와같이규슈북부에서보이지않는형태의것들도있기에한반도에서대마난류를타고선단이직접교역을하러온것을나타내는자료라할 수있습니다.
석호로 이어져 있는 마을과 마을

석호는모래섬등이만어귀에발달해바다와분리된얕은호수입니다. 파도가잔잔해배를정박하기쉬워일본해를동서로연결하는항구로최적의장소였습니다. 교류가활발했다는증거로, 제조방법과모양이같은철기및고기잡이도구, 구슬, 목제품등이연안유적에서출토되고있습니다.
또한, 석호로흐르는하천을거슬러올라내륙의마을과도교류할수있었습니다. 사누카이트(안산암)나분동형토제품과같은제사도구는주고쿠산지를넘어유통된대표적인물건입니다.